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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2012-05-26)
산림문학기행 중 관세음보살 설명 후기
 

산림문학기행 중 관세음보살 설명 후기

 

○ 장발장과 위기(危機)의 고뇌

  “산림문학기행 중 관세음보살 설명”의 글을 마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자기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진리로 알고 있는 것이 틀린 것이거나, 참답지 않을 경우도 많지 않을까? 하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또 내가 관광버스에서 불교에 대해 설명한 내용 역시 매우 미흡하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배고파서 우는 족하들을 위해 빵을 한 개 훔친 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탈주를 하는 등 여러 가지의 죄가 추가되어서 19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석방된 후에는 성당에 가서 은촛대를 훔치기도 했지만, 그 성당의 신부가 은촛대를 장발장에게 선물해 준 것이라고 말해서 겨우 풀려난다. 후에 은촛대를 판 돈으로 성공을 해서 큰 돈을 벌기도 하고 시장이 되기도 해서 존경을 받기도 한다.

 

나는 대학 다닐 때 차비가 한 푼 없어서 청주에서 서울까지 몰래 기차를 훔쳐 타고 용산역에 내렸다가 검표원에게 잡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겨우 자비로운 검표원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고, 용산역에서 지금 신도림역 부근에 있던 집까지 새벽길을 걸어서 온 일이 있다. 나도 그 때 운이 없었다면 구치소로 끌려갔거나, 장발장 비슷한 고초를 겪지 않았으리라는 장담이 없다. 잘 기억되지는 않지만 나도 10여분 동안 검표원에게 사정 사정을 하는 동안 아마도 『관세음보살』을 수없이 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장발장이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면 “오마이갓”을 수없이 외웠을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다 보면 수없는 위기(危機)의 순간, 절망적인 순간 또는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뇌(苦惱) 속에서 오직 하늘의 도움을 바라는 때가 있을 것이다. 이같은 위기의 순간, 절망적인 순간 또는 괴로움에 빠져서 고뇌를 겪는 순간은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나도 수 십 번 이상 겪었던 일이며, 아마 다른 사람도 수십 번 또는 수백 번 겪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기독교 신자라면 신(神)의 도움을 빌 것이며, 불교 신자라면 불보살님의 도움을 빌어서 위기의 순간이나 고뇌의 순간에서 무사히 벗어나기 빌 것이다. 사실상 과학적으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종교가 세상에 살아남고 정치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람들이 위기와 고뇌의 순간에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신을 찾거나 또는 불보살을 찾는 데 종교가 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백년을 못 사는 인생에 순탄한 때도 많지만 참으로 어렵고 괴로운 때도 많은 것이다. 친구나 친척들 중에는 큰돈을 벌고 잘 나가다가 갑자기 망하기도 하고, 자신이 큰 병에 걸려서 죽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이 큰 병에 걸려서 여러 해를 가족 간호에 자신이 바라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할 것이다. 물론 때로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거나 복권에 당첨되어서 전혀 다른 새로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이 경우에 전의 마음과 후의 마음이나 가치관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수시로 바뀔 수 있는 자기의 삶이나 가치관이나 생각들이 진정 진리와 부합할 수 있는 마음일까? 나만이 또는 내가 확신하고 있는 삶의 가치가 보편적인 삶의 가치이고 또 진리라고 장담하면서 남에게도 강요할 수 있을까? 인간의 고상한 본능 중의 하나는 자기의 삶에 늘 행복을 느끼고 감사하면서 사는 동안 행복하고 평안함 속에 죄짓지 않고 좋은 일 하면서 살다가 죽기 바란다. 죽은 후의 일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죽은 후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괴로운 지옥보다 천국에 갈 수 있어야 한다면서 종교를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권유하기도 하는데, 이런 권유에 희망을 걸어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기도 한다.

 

○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어떤 곳인가?

 

  그러면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이란 과연 어떤 곳일까?

  기독교의 경우 천국을 수없이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천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이 없다. 구약에는 『에레미야 23장 18절』, 『시편』 89편 7절, 82편 1절, 2편 4절, 『잠언』 21장 16절, 이사야 40:22 등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거처인 셋째하늘(The third heaven)에는 그 누구도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신약에서는 『에베소서』 4장 10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하늘 위로 올라갔다고 기록되고, 바울은 『고린도후서』12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 일찍 셋째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일이 있음을 말하면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하면서 천국에 대한 설명을 거부했다고도 한다. 또 『요한계시록』, 『베드로』, 『요한』등을 인용해서 세상의 종말이 오는 말세(末世)에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죽은 사람을 포함해서 14만 4천명의 진실한 신자들을 하늘로 들어올리는 휴거(携擧: rapture; 황홀경)를 경험하고 나머지 인간들은 모두 불로 심판을 한 후, 이 땅 위에 천년왕국을 건설한다고 말하기도 한다(여호와증인들의 주장이기도 함).

 

  회교 경전인 코란(꾸란)의 36장, 55장, 56장 등에서 설명하는 천국(天國)의 경우,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다가 죽게 되면 종말(終末)의 날(종말의 날은 주님만 알 수 있다고 함)에 주님의 심판에 따라서 (산사람이나 죽었던 사람들도)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게 되며, 천국에 가는 사람은 그의 아내들과 함께 천국에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된다. 그 천국은 아라비아 사막의 무더운 더위와 달리 항상 시원한 바람이 불고, 야자나무의 시원한 숲과 각종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고, 아름다운 산해진미와 과일과 고기들이 풍성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소년들이 맛있는 술로 시중을 들고, 눈이 크고 아름다운 천국의 마누라도 새로 생기게 되며, 금으로 장식한 침상에 기대어서 천국의 예쁜 여자들에게 늘 시중을 받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코란의 이런 천국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는 많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천국에 가서 일하지 않아도 온갖 산해진미에 쌓여 먹을 것을 즐길 수 있고, 마누라들 뿐 아니라 천국의 아름다운 새 마누라까지 즐길 수 있다는 천국은 그야말로 5감의 욕심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넘치고, 천국의 아내까지 생길 수 있는 천국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 희망이 필요 없는 곳으로 보였다. 희망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사는 절망의 땅이 바로 코란이 말하는 천국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회교의 천국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부연설명을 좀 해 주셨으면 좋겠다.

 

  흔히 불교를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고 오로지 지옥에 가서 지옥불 속의 괴로움 속에 영원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떤 브라만교(현대의 힌두교)의 제사장이 대범천(大梵天)이란 천국에 범천(梵天)이란 신이 사는 천국이 어떤 곳이냐? 고 묻자, “내가 대범천을 잘 아는 것이 어떤 마을에 사는 사람이 그 동네의 구석구석까지 잘 아는 것 보다 내가 더 잘 안다.”고 하면서 “대범천은 당신들의 브라흐만 경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결혼을 하지 않는 곳이며, 오감의 욕심을 벗어난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면서 “지금 결혼해서 온갖 오감의 욕심을 탐하는 브라만 제사장들은 도저히 갈 수는 없는 곳이다. 대범천에 가려면 오감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라고 하면서 대범천 천국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신다.

 

  또 불경에서는 사천왕 천국(四天王天), 제석천 천국(帝釋天, 桓因天, 33천, 도리천이라고도 함), 지금 미륵보살이 수행하고 계시는 도솔천 천국(兜率天), 아미타불국토라고도 하는 극락(極樂) 등 수많은 천국에 대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 복을 누리는 정도, 천국의 크기 등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또 불경에는 아난의 요청에 따라 부처님 당시 부처님께 귀의해서 선행을 했던 많은 불교신자들 수 십 명에 대하여 그들이 지금 어디에 태어났느냐? 는 질문에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천국에 가서 어떤 행복을 누리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수없는 천국을 말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도솔천, 극락 등과 같이 천국에 태어나게 되면 늘 불교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수행하면 깨달음을 빨리 얻는 곳도 있다.

 

  불교 수행자인 승려들은 이런 오감(五感)의 행복(불교에서는 五欲이라고 한다)을 누린다는 천국조자 단연 거부하고, 오감의 쾌락을 영원히 벗어나서(이를 解脫이라고도 말한다), 진리를 깨달아서 확신한 영원한 정신적 평온(이를 涅槃이라고도 말한다)을 얻고자 일반인이 보기에는 고생을 사서 하는 수행(修行)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하는 피나는 고행은 돌팔이 불교신자인 내가 보기에도 힘든 수행이며, 따라 하기에는 까마득히 먼 나와 다른 길로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불교를 깊이 믿고 철저히 수행을 하는 사람은 그 결과로 무지무지하게 부자가 된다거나 출세를 한다거나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서 아들딸 잘 낳고 평생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바라고 불교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일반인이 꿈꾸는 오감의 행복(五欲)을 오히려 전혀 바라지 않고, 거부하며, 초월하여, 수행자들이 원하는 정신적 높은 경지를 향해서 죽을 때까지 매진하는 것이며, 윤회해서 다시 태어나는 생에도 이같이 출가수행을 서원하기도 한다.

 

  실용적 사상이 강하고 또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교사상 뿌리가 깊은 중국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부처가 된다는 인도의 사상을 배격하고 부처의 마음을 바로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화두(話頭)를 들고 열심히 정진해서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이 선불교(禪佛敎) 전통이 중국에서는 맥이 끊어졌지만, 한국에서는 우리가 방문한 태을암(太乙庵)에서 구한말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으셨다고 하는 경허(鏡虛) 스님에 의해서 다시 중흥되었다. 이후 경허스님의 많은 제자들과 선사들이 나타나서 현재 조계종(曹溪宗)이 가장 중요한 한국의 불교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안내자도 설명을 안 해 주었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우리가 방문한 태안의 태을암은 경허스님이 피나는 수행정진을 계속한 암자이고 또 깨달음을 얻은 장소이므로 사실상 한국 조계종의 성지이고,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매우 기념비적인 장소인 것이다.

 

  오욕(五欲)을 즐기고, 오욕의 편안함 속에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나 같은 돌팔이 불교신자로서는 때때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두려움을 느낀 경우도 많았다. 일반인이 추구하는 행복이나 편안한 삶을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고, 수행자가 추구하는 삶의 깨달음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하는데, 유위법과 무위법은 다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법(法)이고 마음을 깨달으면 유위법과 무위법이 둘이 아니어서(不二), 수행자들은 무위법(無爲法)으로 온갖 유위법(有爲法)의 중생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수 십 개소의 천국을 설명하고 있는데, 엄청 행복하게 산다는 낮은 단계의 천국도 출가자들 중에는 거부하는 분이 많다(도솔천이나 아미타불 극락의 경우 늘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어서 일반 천국과는 다르다). 나 역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한다면, 천국 보다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놀고먹는 천국(天國)은 잘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 불교의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피나는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깨달음이란 도대체 어떤 세계일까? 의상대사 법성계에도 『깨달음의 경지는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지이다(證智所知非餘境)』라고 말한다. 불경을 조금 읽어본 정도의 불교 신자인 나 자신도 깨달음의 경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헛개비 같은 경지를 믿고 이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가?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든, 나같이 불교 지식이 천박한 사람이든 간에 불교의 깨달음에 대해서 짐작이라도 할 수 있어야 바로 믿고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늘 생각해 왔으나,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설명을 뚜렷하게 해 주는 사람을 거의 만나보지 못하였다.

 

한국불교의 대표적 종단인 조계종은 선종(禪宗)을 표방하는 종단이기 때문에 승려는 다른 것보다 화두(話頭)를 들고 오로지 좌선을 하면서, 옛날에 중국 선사(禪師)들이 말한 『화두의 뜻이 무엇인지만을 철두철미하게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승려들이 많다. 재가 신도들에게도 자신의 행복이나 가족의 평안을 빈다거나 자식이 잘 되기를 비는 것은 미신(迷信)을 믿는 것처럼 질타하면서, 이런 기복불교(祈福佛敎)를 버리고 오로지 참선 화두를 들고 깨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 자신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은 여러 해 화두로 들고도 깨치지도 못한 주제에, 바쁘게 사는 일반인에게까지 화두를 강요하는 것을 매우 못 마땅히 여기고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 자신 다만 몇 분 동안이라도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해 본 경험이 없다. 또 이렇게 화두만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깨달음의 실체가 어떤 것이라고 하는 구체적 설명을 들어 본 일도 없고, 또 거부감을 갖는 나로서는 특별한 동기가 없는 한 화두를 들게 될 일도 없을 것 같기 때문에 화두를 통한 깨달음은 영영 얻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불교의 깨달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나 자신을 비롯한 일반 사람들이 짐작이나마 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줄 수는 없을까?”하고 자문자답을 해 보았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매일 저녁 몇 분간 씩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오온개공(五蘊皆空)과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갖고 이 뜻을 알려고 늘 노력해 오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불교의 깨달음이란 이 구절들과 연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불교에서는 일반인의 지식이나 지혜와 달리 바음바탕(心地)의 근본을 깨닫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지혜를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이다. 이 반야의 지혜(智慧)에 의해서 관세음보살도 깨달음을 얻었고, 부처님도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은 260 글자의 한자(漢字)로 된 짧은 경전으로 그 뜻이 너무 심오해서 일반인이 알기 어렵다. 내가 10여 권의 해설서를 구입해서 읽어 보았지만, 해설서로도 이해할 수 없었고, 내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다.

 

범부인 나로서 감히 내가 이해한 것을 짧게 설명한다면(*혹시 잘못 설명했더라도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깨달음의 지혜(般若)는 인간의 마음바탕(心地) 그 자리를 확연히 아는 지혜”를 설명한 것이다.

“마음바탕의 그 자리는 원래부터 허공과 같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空). 그 마음자리에 우리가 바깥세상(色)을 받아들여서(受), 온갖 생각을 하기도 하고(想), 이에 따른 갖가지 행동을 하기도 하며(行), 이를 마음속에 기억하거나 저장하기도 하지만(識) 이 5가지의 오온(五蘊)이 순간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세상만사, 일체법(一切法, 諸法)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만사나 일체법은 진실한 진리가 아니다. 단지 인연 따라 순간순간 생겨서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마음바탕은 허공과 같이 텅 빈 것이지만, 구름이 생기기도 하고, 눈비가 내리기도 하고, 천둥 번개가 치기도 하며, 바람이나 태풍이 불기도 하는데, 바깥의 경계를 받아들여서 나타나는 일반인의 마음이란 텅 빈 허공을 알지 못하고 하늘에 생긴 구름, 눈비, 천둥, 번개, 바람이나 태풍 등을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지만, 마음바탕 자체는 허공과 같이 텅 빈 것이다.)

 

일체법(諸法)을 형성하는 마음바탕을 본다면, 마음바탕 자체는 원래 텅 비어있는 것이며(空相) 그대로 불변의 것이다.(不生不滅 不朽不淨 不增不減). 마음바탕 그 자체에는 세상만사 일체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눈귀코혀몸뜻도 있는 것이 아니며, 세상을 보고 느끼는 각종 감각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無色聲香味觸法), 불교의 진리인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제법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며, 죽고 사는 것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無老死)..... 이것을 관세음보살 자신도 투철히 깨달았고 부처님도 이것에 의지해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라는 뜻을 설명하고 있다.

반야심경의 이 가르침은 깨닫는 사람에 따라서 그 깊이와 실천이 크게 다른 것이다. 부처님이나 보살들과 같이 깊이 깨달아서 철두철미하게 실천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나와 같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추측해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체 감각(色聲香味觸法)을 초월해서 행동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말은 하면서도 일체감각에 좋은 것을 찾아 탐닉하려 들기도 하고, 나쁘고 싫은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거나 성을 내기도 하고 애통해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마음바탕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 분의 마음바탕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라고 질문을 드리고 싶다. 실로 마음바탕의 실체를 투철히 알고 또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마음바탕을 깨달은 열반에 네 가지 덕(涅槃四德)이 있다” 라는 말을 한다.

(1) 상(常): 열반의 경지는 인간이 세상만사를 보면서 순간순간 변하는 무상(無常)한 마음과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항상(恒常)함이 있다. 또 100년도 못 살고 사라지는 무상한 인생과 달리 영원한 삶의 깨달음이 있다.

(2) 낙(樂): 열반의 경지는 오감의 쾌락을 탐하는 유위법(有爲法)의 즐거움과 달리 무위법(無爲法)의 안락한 즐거움이 있다.

(3) 아(我): 인간이 자기 자신이라고 아는 것은 찰나적으로 바깥세상 경계를 인식해서 아는 자신을 말하는데, 이는 오온(五蘊)의 집합체에 불과하고, 찰나적으로 변하는 것이며(生滅變化), 진정한 자아(自我)가 아니다. 진정한 자아는 깨달음에서 찾아 낸 나 자신의 참모습 진아(眞我)가 있다(八大 自在가 있다고 함).

(4) 정(淨): 인간은 번뇌의 더러움(不淨) 속을 벗어날 수 없다. 번뇌의 구름에 가리면 달을 볼 수 없지만, 더러운 번뇌의 구름이 흩어지면 청정한 달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깨달음으로서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난 진정한 청정(淸淨)의 덕에 머무르게 된다.

 

또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팔정도(八正道)를 말하고 있다. 일반인이 깨달음으로 향해가는 입장에서 볼 수도 있지만, 깨달은 분의 입장에서 (1) 바르게 보고(正見), (2)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른 삶을 살며(正業), 바른 사명을 수행해 가며(正命, *참고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바르게 노력하며(正精進), 바르게 순간 순간의 마음을 집중하며(正念), 바르게 선정을 한다(正定).

 

나 자신은 깨달음을 잘 모르는 범부에 불과하므로 위의 내용은 『깨달음』에 대해 경전에서 읽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불교의 『깨달음』은 인간이 바라고 욕심내는 온갖 이로움이 가득 찬 것이 아니며, 더더구나 환락(歡樂)에 차 있는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이 하기 힘든 어려운 수행으로 마음바탕(心地)의 본체를 깨달아서 성인(聖人)의 삶을 실천하는 마음』을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반 사람들도 욕심을 쫓아다니는 평범한 인간의 삶 보다, 마음바탕(心地)을 깨달아가면서 성인의 말과 행동을 배우면서 팔정도(八正道)의 바른 삶을 살아가고, 더 높은 경지의 정신적 삶을 추구하는 일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일이 아니라 필요한 일이며,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배척할 가르침이 아니라 관심을 갖고 좋은 뜻을 배워야 할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있다.

 

불교나 깨달음의 가르침이 어려운 것 만은 아닐 것이다. 마치 야구의 룰을 아는 것과 열심히 운동해서 뛰어난 야구 선구가 되는 것이 차이가 있고, 바둑을 둘 줄 아는 것과 열심히 노력해서 뛰어난 바둑의 고수가 되는 것이 다르듯이 불교의 깨달음을 아는 것과 피나는 수행을 해서 큰 깨달음을 얻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비록 재가에 있는 몸이라도 열심히 배우고 수행해서 수행의 깊이가 깊어지면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의 수행과 능력에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 맺는 말

  부처님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무위법(無爲法)을 말씀 하시고, 유위법에 빠져있는 나에게 무위법의 위대함을 가르치셨지만, 범부인 나로서는 오욕을 끊어버리는 무위법을 배우고 따라 하기에 아직 솔직히 두려움을 느낀다. 약 35년 전에 성수(成壽)스님이란 분이 나에게 출가를 권유했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바라고 있는 내 뜻부터 이룬 후에 하겠다고 미루었다. 다만 부처님은 일반인들도 종교나 불교와 관련 없더라도 선업(善業)을 많이 쌓고, 보시를 많이 하면서 살아간다면 내세에 천국에 태어나거나, 인간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큰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여러 경전에 가르치고 있어서 위안을 삼는다. 일반인인 나에게 오감의 즐거움과 오감의 쾌락에 대한 욕구는 너무도 큰 것이어서 이런 욕구를 다 버리고 오직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의 길에 뛰어든다는 것이 너무 택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불교인이라고 말하기에 비겁하기는 하지만, 훌륭하신 승려도 있는 반면 세속에 애착을 갖는 나 같은 신자도 있는 것이므로 나로서는 세속 신자의 입장에서 부처님께 귀의하여 가능한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따라 행하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재가보살(在家布薩)에 대한 말씀도 해 주신 바 있고, 또 유마경(維摩經)이라는 경전에서는 재가 거사인 유마거사가 부처님에 버금가는 경전도 설한 바도 있다. 또 수닷타장자나 당시의 많은 인도 왕들과 같이 부처님의 법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도 매우 많다. 나로서는 낮은 단계의 재가보살이나마 된다거나 낮은 단계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해줄 수 있는 거사라도 된다거나, 바른 삶을 사는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현재의 심정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평생 받았지만 나는 아직도 내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출가해서 무위법에 전념하는 대신, 세간에 살면서 다만 조금이라도 세상을 위하려는 일을 하면서 나의 바라는 뜻을 성취하기 바라기 때문에, 오욕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에게는 발밑에 엎드려서 수없이 오체투지를 서슴없이 올려야 할 처지에 불과하다. 다만 어느 생엔가 세상만사의 즐거움을 다 버리고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와 같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발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發)하고, 불교의 무위법에 전심할 때가 오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내생(來生)이 있다는 것을 경전에서만 읽었을 뿐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다만 희미한 내생의 꿈일 뿐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어느 생엔가 나의 조그만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불교의 가르침이나 철학이 너무 방대하고 또 어려운 점도 있으므로 사족(蛇足)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