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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2014-01-12)
호동왕자가 멸망시킨 낙랑은 평양이 아니다.(회원글터에 내용을 넣을 수 없어서 이곳에 올림)
  김청광이사장님 및 박학순사무처장님께

산림문학 원고 <역사 평론> “호동왕자가 멸망시킨 낙랑군은 평양이 아니다”라는 글을 보내드립니다. 과거의 역사에 각종 허구(픽션)를 써서 역사소설을 쓰는 경우에는 문학으로 큰 대접을 받는 한 가지의 장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쓴 <역사 평론>은 삼국사기에 쓰여진 글을 그대로 옮겨 쓰고, 여기에 대한 나의 <평론>을 추가한 것이므로 소설이나 수필이나 시 등과 달리 <평론>이라는 전혀 다른 장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역사 <연구논문>으로 쓴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식민사관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겠지만, 무엇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는 잘 아시지 못할 것입니다. 이 <역사 평론>은 한사군인 낙랑, 진번(후에 대방), 임둔, 현도의 위치가 아직까지 국내 사학자들에 의해서 압록강 이남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것이 삼국사기의 전투기록을 보면 전혀 아니고, 요동과 요서의 고구려와 중국 국경 지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글쓰는 재주가 없어서 독자들에게 실감나게 문학적 표현을 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르게 아는데 이 글이 꼭 필요할 것으로 보이며, 사실 저에게는 “산림문학”이 아니고서는 이런 글을 올릴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습니다. 또 김이사장님이 다소 짧은 글을 써 달라고 하는 부탁에 줄이는 것을 여러 번 검토해 보았지만, 제 능력으로 줄이지를 못해서 다소 페이지가 늘겠지만, 제가 보기에 1-2 페이지 정도 늘어도 큰 문제는 아닐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량하여 주옵소서.

김이사장님과 박사무처장님께서 잘 검토해 주시고 꼭 실어 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이번에 “그만해도 천만다행이다”라는 글을 올리려다가 이글을 먼저 올리오니 꼭 게재되도록 심사관님들에게도 부탁을 드려 주시기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2014. 1. 12(일) 이태수 올림












<역사 평론>

호동왕자가 멸망시킨 낙랑군은 평양이 아니다.

이 태 수

◯ 머릿말

이 글은 호동왕자가 멸망시킨 낙랑은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와 중국의 접경지역인 요하(遼河)지방에 있었음이 분명함을 알리고자 쓴 글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당서(唐書)를 인용하여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이다(唐書云 平壤城漢樂浪郡也).“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잘못된 인용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에 ”낙랑군은 한무제 3년에 처음 봉해졌는데, 왕망(王莽)은 낙선이라고 했고, 유주에 속했다.(乐浪郡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라고 해서 낙랑이 요서 유주에 속했다고 분평히 기록 했는데, 김부식은 이 사실을 몰랐거나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주는 평양에서 2천리 가까이 떨어져 있는 지역이어서 도저히 평양이 낙랑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이후 특히 일본 사학자 및 이를 추종한 식민사학자에 의해서 역사를 극도로 왜곡하였다. 그동안 많은 재야 사학자들이 반론을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일제 때 이마니시류(今西龍), 이나바이와기치(稻葉岩吉)등 여러 일본학자들이 평양지역 낙랑설, 임둔군의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설, 현도를 평북 산악지역에서 만주 푸순(撫順)으로 옮겼다는 설을 비롯해서, 이병도는 진번군을 황해도 은율을 중심으로 동쪽은 춘천, 북쪽은 자비령, 남쪽은 한강 북안에 이른다는 주장을 하여 오늘날 까지 이들의 주장이 한국의 교과서에 그대로 실리고 있다. 그 결과 동북공정 후 오늘날 중국의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한강 이북을 모두 중국 한나라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삼국사기를 통독하면서 고구려와 중국의 전투지역을 살펴본 결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한사군(낙랑, 진번, 임둔, 현도)가 모두 고구려의 서쪽 요동 및 요서의 경계지역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데 조금이라도 참고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적혀 있다. 제3대 대무신왕 15년(AD 32년)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 지방을 유람하는데,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순행하다가 묻기를 “당신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혹시 북국신왕(北國神王; 大武神王)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드디어 함께 데리고 돌아와서 사위로 삼았다. 그 후 호동이 환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어 최씨의 딸(樂浪公主)에게 말하기를, “만약 그대가 당신 나라의 무기창고에 들어가서 고각(鼓角)을 베어 부순다면 나는 예로서 맞이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나는 그만 두겠소.”라고 하였다. 전부터 낙랑에는 고각(鼓角; 自鳴鼓)이 있어서 만약 적병이 몰려오게 되면 저절로 울리기 때문에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의 딸(樂浪公主)은 잘 드는 칼로 북의 가죽을 찢고, 각구(角口: 나팔을 부는 곳)을 잘라낸 후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고구려의 군사가 엄습하여 성 아래에 이른 것을 본 후에야 고각이 모두 부수어진 것을 알고 드디어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을 없애기 위해서 고구려에서 낙랑에 혼인을 요청하였고, 그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았는데, 후에 본국으로 보내서 무기를 부수게 하였다고도 한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 중에서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지방을 유람했다고 하는데, 현재 한국사(韓國史)에서는 옥저를 함흥지역이라고 하나,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의 옥저전에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는 글을 볼 때 현도는 처음에 옥저의 전체거나 일부에 설치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후에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고, 또 현도군을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고 하므로, 현도(전의 옥저 땅)는 낙랑의 동쪽임을 나타낸다. 지금의 국사책을 보면 현도가 애초부터 평안북도 산악지대와 즙안 부근이어서 저들이 말하는 낙랑(평양)의 동쪽이 아니며, 후에 옮겨진 곳도 푸순(撫順)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현도가 낙랑의 북쪽에 있을 수 없다. 한국사 책에는 엉뚱하게도 옥저는 함흥평야 지역이라고 지도에 나온다. 이같은 한국 고대사의 여러 군데 앞뒤가 맞지 않는 여러 기술은 수정되어야 한다.>


삼국사기에는 낙랑왕 최리가 대무신왕 15년(AD 32년)에 왕자 호동과 함께 침략한 고구려군에게 항복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나 대무신왕 20년(AD 37)에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없앴다(王襲樂浪滅之).”라는 내용이 또다시 나온다. 이를 보면 1) 최리 낙랑국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소탕한 것인지? 2) 또는 별도의 낙랑이 있는 것인지? 3) 낙랑이라는 중국의 땅이 별도로 있어서 계속 사용한 것인지? 분명치 못하다. 그뿐 아니라, 한국사는 삼국사기에 “15대 미천왕 14년(AD 313년)에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을 침범하였다.”는 기록을 인용하여 이후에도 약 300년간이나 더 낙랑이 평양을 근거로 존재했고, 대방이 AD 314년까지 황해도에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같은 기록은 잘못된 주장이다.


◯ 고구려와 중국의 전쟁 중 한사군과 관련된 내용들
제4대 민중왕(閔中王) 4년(AD 47년)에는 “잠우락부의 대가재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2년 후인 제5대 모본왕(慕本王) 2년(AD 49년)에는 “고구려가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기도 하였는데,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함으로 이내 화친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북평은 오늘의 북경(북경)이 한 때 북평(北平)이라고 불렸던 점을 상기하면, 북경 부근일 가능성이 있고(인터넷을 보면 일부 사람들은 북경보다 훨씬 남쪽의 석가장시 북쪽이라고도 함), 어양은 지금의 북경시 동쪽이라고 하며, 상곡은 진나라 때 통합된 연(燕)나라의 북부지방이고 사기(史記)에는 탁록 지역이라고도 한다. 또 태원(太原)은 용성(龍城)이라고도 불렸던 지역으로 지금 산시성(山西城)의 성도이며, 북경보다 훨씬 아래에 위치한 타이위엔시(太原市)로 비정되고 있다. 고구려가 한나라와 경계를 이루고 또 싸운 지역은 모두 중국의 북경 부근 지역과 그보다 더 남쪽의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


제6대 태조대왕 3년(AD 55년)에는 “요서(遼西)에 10개의 성(城)을 쌓아 한병(漢兵)에 대비하였다.”고 하였다. 요서 지방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고구려가 요서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여 주는 대목이다. 53년(AD 105년)에는 “한(漢)나라의 요동(遼東)에 고구려의 군대를 보내어 6개의 현을 약탈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미 요동과 요서에 고구려의 국경이 있음을 나타낸다. 또 59년(AD 111년)에는 통감(通鑑)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예맥(濊貊)과 더불어 현도를 침구했다.”고 하였고, 66년(AD 118년)에는 “한의 현도에 습격하여 화려성을 공격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고구려의 국경 넘어 한나라를 침략한 내용인 것이다. 태조대왕 69년(AD121년)에는 “한나라의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의 거수(渠帥)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이에 고구려 태조대왕은 아우인 수성을 보내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를 반격하였다. 수성이 사자를 보내서 거짓 항복을 하니 유주자사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은 이를 이용해서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대군을 차단하고 몰래 3,000명을 보내어 현도군과 요동군을 치고 그 성곽을 불살랐으며, 2000여 명을 살획하였다. 이어 여름 4월에 태조대왕이 선비의 군사 8000명을 데리고 요대현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내어 신창에서 싸우다가 죽었다....또 이해 12월에 왕은 마한(馬韓),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범하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한의 군사와 힘을 합쳐서 막아 싸우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였다. 이듬해인 70년에 왕은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범하니 부여왕이 한에 구원병을 보내어 고구려의 군사를 막았다.(마한은 온조왕 27년(AD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고구려 왕과 더불어 군사 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 후 다시 일어난 것일까?”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한나라의 유주자사, 현도태수, 요동태수 등은 요동 또는 요서의 한나라 군현이며, 고구려와의 국경이역이다. 현도태수(*옥저 땅에 설치됨, 후한서), 요동태수 등이 예맥의 거수를 격살했다는 것은 예맥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요동 부근의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 현도가 평안북도 북쪽에 있다가 만주 푸순(撫順)으로 갔다고 하는 한국사 통설은 잘못된 것이며,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 부근에 옥저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한국사(韓國史)나 삼국사기 온조왕 편에 AD 9년에 마한을 완전히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110년 후, AD 121년 고구려와 함께 2번씩이나 요동을 공격한 마한은 김부식도 몰랐지만, 전라도 쪽에 있는 마한이 아니라, 고구려와 중국의 국경 부근 요동지역에 마한이 별도로 있었다고 가정을 해야 할 것이다.>


태조대왕은 94년(AD 145년)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 <*여기에 기록된 서안평현은 어디일까? 한국의 사학자들은 아직까지 이곳이 압록강 건너의 단둥(丹東)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해서 식민사관을 호도하고 있으나, 결코 단동일 수 없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는 “요사(遼史) 지리지에 상경임황부(上京臨滉府)가 한나라 때 요동군 서안평이었다.”고 해서 현재 내몽골의 파림좌기 지역이라 주장하고 있고, 또 서안평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다른 설이 많다. 요동군 서안평현을 공격해서 대방령을 죽이고 또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은 지역이 결코 황해도나 평양 부근이 될 수는 없다.>


7대 신대왕 4년AD 182년)에는 현도군이 침입해 와서 싸우고, 또 한나라 대군이 침입해 온 것을 수성(守城) 작전으로 대패시키기도 한다. 8대 고국천왕 20년(AD 267년)에는 “위(魏)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장수 1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침범하니, 왕은 보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역전하여 깨뜨리고 3,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싸워 양맥의 골짜기에서 패배시키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3000여 명이었다.....왕이 철기병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진격하였는데, 관구검이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장군 왕기를 보내어 고구려왕을 추격하였다...밀우가 결사적으로 대항을 하고, 유유가 거짓 항복하면서 적장을 찔러 죽이자 왕은 급히 위군을 공격하여 위군은 낙랑으로 물러갔다....21년(AD 268년) 동천왕은 환도성이 난리로 파괴되어 다시 도읍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사직을 옮겼다.”


<*위의 글을 보면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출발한 곳이 중국 땅의 현도이며, 멀지 않은 곳에 비류수(沸流水)가 있음을 보인다. 이 비류수는 동명성왕이 처음 도읍을 정한 땅이다. 또 유유가 적장을 찔러 죽이자 패한 위군이 물러간 곳은 중국 땅 낙랑이다. 즉 현도와 낙랑은 요동이나 요서의 위나라와 고구려간 접경지역이지, 결코 평양이나 푸순(撫順)일 수 없다. 또 이듬해에 동천왕은 평양에 성을 쌓고 사직을 옮겼다고 했으므로 결코 낙랑이 평양에 있을 수는 없다. 여기서 동천왕이 평양에 사직을 옮겼다고도 했는데, 이곳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은 장수왕 15년(AD 506년이므로 이 당시에 옮긴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평양은 “넓고 기름진 땅”을 의미하므로 사학계에서는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를 밝혀야 할 것이다.>


15대 미천왕 3년(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 311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AD 313년)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을 침범하였다. 16년(AD 315년) 현도성을 공격하여 부수니 적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이 매우 많았다.


<*위에서 보면 미천왕 3년(AD 302)에 현도군을 침범하여 8천명을 평양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현재 사학계에서는 미천왕 14년(AD 313년)에게 침략을 당했고(멸망했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이해에 멸망했다는) 낙랑의 근거지가 평양이었다고 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고구려 땅 평양에 어떻게 낙랑이 남아 있었겠는가? 미천왕에게 AD 314년에 망한 대방이 황해도와 한강이북에 있었다고 계속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서울로 삼고 한강 유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기인데 어찌 황해도에 대방이 있었겠는가?>


18대 고국양왕 2년(AD 385)에는 왕이 군사를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때 연나라 왕 수는 대방(帶方)의 왕좌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는 이를 쳐부수고 드디어 요동∙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왔다. <*이 내용을 보면 대방(帶方)은 연나라에 위치한 지방임을 보여주며 대방태수가 용성을 지켰다는 것은 지금의 중국 태원시(太原市)를 지키게 했다는 것이므로 결코 황해도가 될 수가 없음을 보여준다.>


19대 광개토대왕 11년(AD 401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평주(平州)의 숙군(宿郡)을 치니 연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여기에서 말한 평주(平州)는 진서지리지신보정(晉書地理志新補正) 권이(卷二)에 요서에 속하는 유주(幽州)와 접한 동쪽 지역이고, 또 요동(遼東), 창려(昌黎), 원도(元菟: 玄菟), 대방(帶方), 낙랑(樂浪)군을 합쳐서 평주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보면 한사군의 이름이 모두 중국의 평주에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진서지리지의 분명한 위치표시를 한국의 사학계 학자들이 외면해서 안 된다.>


20대 장수왕 23년AD 435년) “위(魏)나라가 자주 연(燕: 北燕)을 공격하니 연은 나날이 위태로웠다. 연나라의 왕 풍홍(馮弘)이 말하기를, 만약, 일이 급해지면 동으로 가서 고구려에 의탁하고 후일을 도모하겠다.고 비밀히 상서 양이를 보내서 고구려에게 맞이해 주기를 청하였다....이듬해 위나라가 연의 백랑성을 공격하여 이기니 장수왕은 장수 갈로, 맹광을 보내어 군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에 이르러 연나라 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5월에 연왕은 용성(龍城)의 호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장수왕은 그를 평곽에 있게 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북풍으로 옮겼다...


<*이 내용은 우리나라 역사에 전혀 소개가 되어 있지 않은데, 중국의 북쪽에서 거대한 지역을 지배하던 연(燕; 北燕)이 고구려에 합병되고 북연의 지역이 고구려 땅으로 통합되었다. 북연은 수도가 용성(龍城)이었는데, 이 용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있으나 태안시(太安市) 지역을 용성으로 부른 때가 있었다. 다시 말하여 광대한 중국의 북부 지역이 장수왕 때 고구려에 통합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한국사(韓國史)에 전혀 나오지도 않아서 매우 이상한 일이다. 상세한 내용은 삼국사기에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생략한다.>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와 삭주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좌12군의 진격 경로에 있는 북쪽의 현도, 옥저, 낙랑과 우12군의 진격 경로에 있는 남쪽의 임둔, 대방 등은 모두 수나라와 고구려의 경계 부근에 있는 지명으로 낙랑(樂浪) 역시 중국에 속해 있던 지명이다. 결코 평양이 낙랑이 될 수 없다. 15대 미천왕 14년(AD 313년)에 망했다는 낙랑이 수양제 때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역사가들이 무시해선 안 된다.>


이후 수양제가 113만 3800명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때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로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로 나오고, 우어위장근 장근은 양평도로 나오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도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 모두 압록수(鴨淥水) 서쪽에 모였다. 이후 수양제의 대군이 을지문덕에게 패하여 완전 궤멸된 이야기나 이후에도 수양제가 수차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실패한 이야기 등은 생략을 한다. <*이 글에서도 나오는 낙랑도나 현도도, 옥저도는 모두 압록수 서쪽에 있는 땅이며, 결코 평양(樂浪)이나 황해도(帶方)가 될 수 없다.>


보장왕 3년(AD 644) 당태종은 고구려와의 국경지대인 요동과 갈석에서 연개소문의 죄를 묻겠다고 하면서 1차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이듬해(AD 645년) 4월 당의 장수 이세적은 유주에서 출발하여 통정을 거쳐 요수를 건너 바로 현도(玄菟)에 이르렀다. 5월에 이세적은 요동성에 이르고 당태종은 요택에 머물렀다. <*여기에서도 이세적이 지난 현도는 요동성 바깥의 서쪽이고 또 요수의 안쪽이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싸움의 끝은 안시성 싸움이었는데, 당태종은 안시성주 양만춘에게 패해서 철군하였다. 영조 때 홍량호가 쓴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보면 이 때 당태종은 대패해서 안시성의 남쪽 100여리 되는 산속에 혼자 도피해서 숨어 있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고, 그곳에 계명사(鷄鳴寺)를 지었으며, 이 절과 당태종에 대한 기록를 쓴 비석은 영조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결론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당서(唐書)를 인용하여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이다(唐書云 平壤城漢樂浪郡也).“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잘못된 인용이다.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에 ”낙랑군은 한무제 3년에 처음 봉해졌는데, 왕망(王莽)은 낙선이라고 했고, 유주에 속했다.(乐浪郡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라고 해서 낙랑이 요서의 유주지방에 속했다고 했는데, 유주는 평양에서 2천리 가까이 떨어져 있는 지역이어서 도저히 낙랑이 평양으로 될 수 없다.


-호동왕자는 옥저(沃沮) 땅에서 낙랑왕 최리를 만났는데, 지금 한국사에서는 옥저를 함흥평야라고 표시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옥저 땅에 현도를 세웠고 후에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겼으며 낙랑 소속의 동부도위가 되었다고 했는데, 옥저는 중국의 많은 역사서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설세웅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진격해 온 중국 땅의 길목에 있는 곳이다. 평안북도의 북쪽 산악지대에 있다가 푸순(撫順)으로 옮겼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아울러 현도(玄菟)는 전술한 바와 같이 옥저땅에 처음 설치했으므로 옥저와 같은 땅이다. 이후 북쪽으로 옮겨져서 낙랑군의 동부도위로 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수나라의 신세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수나라의 좌12군(고구려 북쪽지방)의 진격해 온 길목에 있었던 곳이다. 또 당의 이세적은 유주를 출발하여 같은 달에 통정, 요수를 건너 현도에 도착했고 다음 달에 요동에 도착해서 공격했다고 기록했음을 볼 때, 요동성 보다 더 서쪽에 있었고, 요수를 건넌 지점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임둔(臨屯)은 수나라의 우십이군(右十二軍)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진격하던 고구려와의 남쪽 국경 지방에 위치한 지명이며, 한국사 교과서에 함흥 땅에 임둔이 있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대방(帶方)은 수나라의 우십이군(右十二軍)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진격하던 고구려와의 남쪽 국경 지방에 위치한 지명이며, 진서지리지신보정(晉書地理志新補正) 권이(卷二)에 의하면 또 요동(遼東), 창려(昌黎), 원도(元菟: 玄菟), 대방(帶方), 낙랑(樂浪)군을 합쳐서 평주(平州)라고 기록하였을 볼 때 중국의 평주에 속한 땅이다. 대방을 황해도라고 추정한 것은 올바른 추정이 아니다.


-이병도(1927)는 “진번군고(眞蕃郡考)에서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군(眞蕃郡)을 황해도 은율(殷栗)을 중심으로 동쪽은 춘천 일대, 북쪽은 자비령, 남쪽은 한강 북안에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또 진번군이 후에 대방군에 합병되었다고도 하며, 진번군 황해도설은 아직도 한국 사학계의 정설이 되어 있다. 그러나 “최초 15개현을 통괄하던 진번군은 토착세력에게 밀려서 후에 낙랑군 남부도위(樂浪郡 南部都尉)로 편입되고 7개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라는 위키백과사전의 기록을 보면 중국 평주에 위치한 낙랑의 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현은 매우 넓은 땅이어서 황해도 은율에 설치된 진번군이 7개의 현을 다스렸다는 이병도설은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장수왕 때 연(燕; 北燕)이 항복해 오게 됨으로써 중국 북쪽의 연나라가 통치하던 넓은 땅이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나, 한국사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당시 연(燕)나라 땅에는 수도이었던 용성(龍城), 유주(幽州), 평주(平州) 등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수나라 때는 유주가 수나라 영토로 다시 나타나고 있지만 이 부근이 오래 동안 고구려 땅이었다는 사실이 한국사에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것은 고쳐져야 한다. 더구나 중국은 동북공정을 하면서 지금 한강 이북을 모두 중국의 한나라 땅이었다고 중고등학생들에게 까지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