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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진

시인

1931년 경기도 연천에서 출생하였다. 보성중학교를 거쳐,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55년 《문학예술》지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2007년 대한민국 예술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61~1967년 시 동인지 『육십년대사화집』을 주재하였으며, 1975년에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국제창작계획 과정을 수료하였다.

1979년 4월 구상, 성찬경과 함께 ‘공간 시낭독회’를 창립해 2015년 작고할 때까지 상임 시인으로 참여해 왔다.

시집으로 『실내악』, 『청동시대』, 『빛과 어둠의 사이』, 『박희진 세계기행시집』, 『소나무 만다라』, 『산·폭포·정자·소나무』, 『까치와 시인』, 『4행시와 17자시』, 『영통의 기쁨』, 『니르바나의 바다』(유고 시집) 등 36권이 있다. 월탄문학상(1976), 한국시협상(1991), 보관문화훈장(1999), 상화시인상(2000), 펜문학상(2011)과 제1회 녹색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47년 정지용이 논설주간으로 있던 <경향신문> 2월 26일자 투고 작품란에 실린 만 15세 박희진 소년의 「그의 시」가 그 표현과 사유의 조숙함으로 문단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던 수연 박희진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시를 위해 전념하였다.

|작품세계| 

‘영성靈性의 풍경’ ‘영성靈性의 풍경’

 

시인 성창경


1. 풍류도虱流道


(중략) ‘녹색문학상’의 취지는 ‘숲사랑’ ‘생명존중’ ‘녹색환경보존’이라는 글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인류가 무분별하게 탐욕을 발휘하여 자연을 학대하는 일은 이제 고만두고,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과 함께 번영해 나가도록 하자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박희진 시인이 평생에 걸쳐서 묵묵히 실천해온 그의 삶의 내용이기도 하다.


실로 그의 자연 사랑은 남달랐다. 지금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쉬지 않고 써온 33권의 시집(앞으로 또 나올 것임)을 살펴보면 『산화가散花歌』(1988), 『북한산 진달래』(1990), 「몰운대의 소나무』(1995), 『백사백경白寺百鏡』 (1999), 『화랑영가花郞靈歌』(1999), 『동강東江 12경』(1999), 『하늘 땅 사람』(2000), 『꿈꾸는 탐라섬』(2004), 『소나무 만다라』(2005), 『섬들은 외롭지 않다』(2006), 『이승에서 영원을 사는 섬들』(2006), 이번에 수상작이 된 『산·폭포·정자·소나무』(2010), 『까치와 시인』(2011), 대충 추려 봐도 이런 정도이며, 이 시집들은 모두가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의 영묘한 조화 교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들이 서로의 아름다운 상부공영相扶共榮을 지향指向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박희진 시인의 소나무 사랑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어 ‘소나무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정도이다. ‘명송名松’이 있다고 들으면 길이 멀고 험한 것을 가리지 않고 찾아갔고, 그때 그때 소나무를 주제로 하는 시를 써왔으며, 그리하여 소나무 시만 삼백여 편을 헤아리게 됐다.


박희진 시인의 자연 사랑이 단순히 ‘자연을 사랑한다, 애호한다’ 차원에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사랑에 형이상학적인 사색과 깊이를 쌓아갔다. 그리하여 그가 추구해나간 것이 ‘풍류도인風流道人’ 이라 할 수 있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풍류도 사상연구다. 풍류도 사상을 총체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박희진 시인은 대한민국 예술원의 제47회 회원 세미나에서 한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풍류도의 제창자라 할 수 있는 최치원과 최치원 연구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범부凡夫 김장설과 근세에 와서 풍류도를 실천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모두 관련시켰다. 지금 이 논문의 요지를 소개할 여유는 없고, 풍류도관風流道觀을 짐작할 수 있는 시구(이 논문에 실려 있다)를 인용할까 한다.


다름 아닌 「풍류도」라는 시인데, 박희진 시인은 우선 풍류를 우리말 멋과 동의어로 전제한 다음, ‘왜 이 강산은 도인의 나라인가? 풍류가 있기 때문. / 왜 이 나라에 풍류가 생겼는가? 강산이 더없이 오묘한 때문.’ 이렇게 읊고 있다. 아름답고 오묘한 강산에 구도적인 사람이 삶을 살아나가니, 멋스러운 풍류가 절로 생겨났다는 풀이인데 사람과 자연과의 인연을 이 이상 더 아름답게 관계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박희진 시인을 이 시대의 대표적인 풍류시인으로 꼽는 데 주저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가느다래진 풍류도를 더듬어서 이 길을 다시 번듯한 길로 되살리려는 노력에서도 박희진 시인만큼 심혈을 기울이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2. 예술가의 윤리


내가 박희진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요새 학제로 쳐서 고 1 무렵이었다. 내가 중2 때 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는데, 그때까지는 공주중학교를 다녔다. 공주중학교에서 어찌나 일제식 군국주의 교육에 시달렸던지, 해방과 더불어 이 학교에는 발을 끊었다. 해방 즉시 어슬렁어슬렁 서울에 오니 마침 보성중학교(당시 6년제)에서 편입생을 뽑는 중이어서 이 학교에 편입하게 되었다.


고2 때 알게 된 박희진은 이미 보성중학교에서는 웬만큼 알려진 ‘천재’ 문인이었다. 이목구비 수려한 미소년에다가, 늘 울울히 타오르는 문학적 정열을 품고 우수에 찬 표정으로 교정을 왔다 갔다 하는 소년 박희진은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카리스마 였다. 독서량이 엄청나게 많았고 이미 육필 시집을 한 권 마련해 놓고 있었다.


박희진의 강력한 매력에 끌려 나는 이과반에서 문과반으로 전과하고 말았다. 이때의 일을 나는 농담 삼아 ‘박희진이라는 문학의 독벌레에 쏘여 인생의 노선을 이과에서 문과로 옮겼다’고 요즈음도 말하곤 한다. 이렇게 모여 문학소년 3인조가 출현하게 되었으니, 박희진, 나, 소설가 서기원徐基源이었다. 우리는 지칠 줄도 모르고 치기어린 문학론으로 서로 토론하고(싸우고), 격려하며 미래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때부터 알게 된 일인데, 소년 박희진은 이미 문학작품을 논평하는 감식안이 예리하고 정확했다. 그리고 이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평가하기 쉽지 않은 알쏭달쏭한 작품도 즉시 정확한 저울로 달듯 그 진가를 평가했다. 그는 정열적인 만큼 신경도 예민한 편이었다. 그런 그가 우수어린 낮은 목소리로 보들레르, 랭보 등을 논할 때는 참으로 외경畏敬스러웠다. 그는 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누가 장래의 희망에 대해 물으면 ‘문학자文學者’가 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고 한다.


박희진 시인의 성품상의 특색에서 남다른 점을 몇 가지 지적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예술가적 윤리에 관한 그의 철저한 인식과 의지다. 여기서 나는 시인의 ‘윤리의식’ 운운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박희진 시인 개인의 처지와 관련시켜서 박희진 본인이 판단하는 윤리의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박희진 시인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자기의 시인적인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아무리 강력한 유혹이라도 그것을 단호히 물리친다. 절대 굴복이나 타협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어떤 일이 자기의 시인적 생활에 유익하다고 판단하면 어떠한 어려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반드시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야 만다. 이러한 의지와 실천에 관한 한 박희진 시인은 거의 초인적이다. 박희진 시인은 ‘가정을 갖는 것이 그의 시인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실천했다.


이런 일들을 두고 남들은 더러 기이奇異하다고까지 말할 여지가 있다. 허나 기이할 것은 하나도 없다. 박희진 시인은 마치 수도자가 수도를 하기 위해서는 독신생활을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가정을 갖지 않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뿐이다. 이런 일이 세상에 흔할 리는 있나. 허나 흔치 않다고 해서 기이할 것도 없다. 날더러 이 일을 논하라면, 박희진 시인의 생애는 세상에서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한다고 말하겠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윤리적 삶의 실천은 차라리 ‘신화적神話的’이라 할 만하다.


3. 영성靈性의 문학


박희진 시인은 불교의 사상을 주제로 해서 이미 많은 시를 썼다. 불교신자가 박희진 시인을 보면 박 시인을 ‘불교시인’이라고 하기에 딱 좋을 정도이다. 한편 박희진 시인은 천주교의 ‘성인신부’라는 칭호를 듣기도 하는 방유룡方有龍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제로 한 시도 여러 편 썼다. 그렇다면 박희진 시인은 가톨릭 시인인가? 그렇지도 않다. 한편 박희진 시인은 자연 사랑, 나무 사랑을 읊으며 ‘녹색시’도 많이 썼다. 그렇다면 박희진 시인은 '환경론적 시인인가? 아닐 것도 없지만, 그렇게만 단정할 수도 없다.


여기서 나는 박희진 시인의 문학을 포괄적으로 품을 수 있는 넓은 개념으로서 영성靈性의 문학이라는 개념과 장르를 도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지향志向해야 할 방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상대 앞바다, 망망대해에

자욱했던 어둠을 노송은 빨아들여,

혼신의 힘을 다해 밤새도록

시나브로 빨아들여

마침내 노송이 칠흑의 묵송 되자

수평선 뚫고 해가 솟아올라

바다 위에 황금의 기왓장 까누나.

해 바다 소나무가

제각기 극명한 제 모습 지니면서

간격이 없는, 완벽하게 하나를 이룬,

이 찰나 속 영원의 조화 보라.

이 아름다운 극치의 황홀 보라.

-「낙산사 의상대 노송 일출」전문-


시집 『산·폭포·정자·소나무』의 ‘자서’ 중 “제4부 ‘소나무’에 대해서”를 살펴보면, 「낙산사 의상대 노송 일출」에 드러난 수연 박희진의 소나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박희진은 “2005년 출간된 바 있는 졸시집 『소나무 만다라』엔 353수의 소나무시가 수록되어 있다. 203수의 소나무 17자시도 포함된 것이므로 그것을 뺀다면 123수의 소나무시가 남게 된다. 그것만 치더라도 한 개인이 그렇게 많은 소나무시를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할 만하다.


철학 박사이자 학술원 회원인 김규영 선생께선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위대한 시업이 드디어 성취되다. 350수의 소나무 절창 모음, 소나무 만다라! 이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발견하고, 정화하고, 연마하여 풍성한 행복을 누리는 일이다」라는 과분한 찬사를 보내주셨고, 전북대학교의 최승범崔塍範 교수께선 「소나무 만다라! 그것은 한 마디로 송경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라고 절찬해 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미쳐야 미친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동안 나는 소나무에 미쳐서 살아온 게 사실이다. 소나무 이외의 다른 인·사·물엔 관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소나무 만다라』 이후에 쓴 소나무시만도 36수를 헤아릴 정도니 알 만하지 않겠는가. 그 36수가 제4부 ‘소나무’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두 달에 한 번쯤 좋은 소나무 보러 가자는 ‘솔바람 모임’의 기별이 오면 원근을 안 가리고 빠지지 않았고, ‘인사동 시낭송회’에서는 연 3, 4년 소나무시 만을 싫증도 안 내고 열정을 다해 낭송했다. 덕분에 내겐 ‘소나무 시인’이라는 별칭도 생겼다. 소나무와 풍류도, 소나무 미학, 소나무 문화, 소나무 시학 등 소나무 화두를 놓지 않았고, 이런 끊임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나와 소나무와 세계와 우주는 하나로 꿰뚫려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대화엄경이 열리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소나무를 탐방하고, 관찰하고, 천착하여 송안柗眼 못지않은 영성적 투시력을 연마해 갈 것이다.” 라고 밝힌 바 있다.


널따란 계곡

한가운데 너럭바위

거연정은 그 위에 있다

거기에 가려면

무지개 다리를 건너야 하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 오래된 목조 정자는

정연한 비례 척도를 갖고 있어

매우 고즈넉한 안정감 자아낸다

일단 들어서면 나오기 싫을 만큼

인공과 자연의 조화도 이쯤 되면

너무 편안해서 멍해질 정도

난간 아래 흐르는 깊고 푸른 물에

마음이 씻겨서야

비로소 들어오는 주변의 경치

멀리 북쪽에선 운치 있는 노송들이

흐르는 물길 따라 솔바람 보내오고

멀리 물길 건너 남쪽 기슭에도

노송들 있어 반가워 화답한다

벽공의 흰 구름도 덩달아 눈짓하고

솔바람과 물소리에 씻기고 씻겨 선지

티끌 하나 묻지 않는 거연정 마룻바닥

아주 한참을 그 위에 앉았다가

벌렁 누워본다 목조 건물은

조촐히 낡아야 나무 향 그윽하다

우리 인간도 곱게 늙어야

거연정 안에서 앉거나 눕거나

자연이 된다 자연과 정자와

인간은 이렇듯 편안히 어울릴 때

구분이 없어지고 셋은 하나 된다

-「거연정居然亭」-


시집 『산·폭포·정자·소나무』의 ‘자서’ 중 “제3부 ‘정자亭子에 대해서”를 살펴보면, ‘거연정居然亭-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이 쓰여진 시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 정자를 작품 소재로 활용하는 의미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자는 다름 아닌 전통 한옥의 원형인 것이다. 그것은 정자가 세워지는 위치를 고찰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산수경개 좋은 곳,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라든가, 전망이 좋은 양지 바른 곳이 선호되고 있는데, 그만큼 무엇보다 자연친화적이라는 점이 정자의 특색이다. 정자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지붕을 받쳐주는 네 기둥과 마루가 있을 뿐 벽도 없고 창도 없다. 그 안에 들어서면 사방이 열려 있어 그렇게 시원하고 아늑할 수가 없다. 자연의 품에 고즈넉하게 안긴 느낌이다. 맑은 바람과 햇살과 흙냄새와 물소리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거연정居然亭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매우 시사적示唆的이다. 그것은 자연 속에 거居한다는 뜻이니까 그 속에 들어가면 인간은 더없이 쾌적해지며 자신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한궁에는 얼마나 많은 정자가 있을까? 모르긴 해도 수천, 수만을 헤아리지 않을까. 도시의 공원이나 주택가에까지 파고든 노인정을(그것은 정자의 현대적 변용이다) 감안한다면 아마 엄청 늘어나지 않을까.


중국에도 정자는 있지만, 내가 본 한, 대개는 청동 따위 철제류의 것이어서 한국의 것만큼 친자연적, 또 친서민적 친근감이나 소탈한 맛은 없다. 또 그 수효도 많지는 않은 듯. 일본의 대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에 의하면 일본엔 정자가 없다고 하니, 한국의 문화를 정자문화라 일컫기도 하는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정자문화의 근원을 캐고 보면 아마도 그것은 한국의 원종교, 풍류도 사상에 가닿게 될 줄 안다.


나는 지금까지 별로 많은 정자를 접했다고 할 수는 없는 만큼 앞으로는 좀 더 열의를 갖고 공부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