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이면 짐승이지 신령하다고? 짐승이라면 신령할 턱이 없다. 신령하다면 짐승일 까닭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신령과 짐승을 하나로 엮어 놓았다. 모순된 말로 무모하게도 상식의 성벽을 깨뜨리겠다는 것인가. 반신반의半信半疑는커녕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령한 짐승이 어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신령하다고 하지 않았겠 는가. 깊은 어둠 속에서 번져오는 모과 향기처럼 보이지 않아도 실재하는 것이 있다. 해월海月께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이 있어야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귀나 눈이 아닌 마음이 열리어 안다는 뜻이다. 신령함이 이런 것이라면 어느 누가 “내가 바로 그렇소.”하고 대뜸 나설 수 있겠는가. 설사 그가 아는 것이 있다고 해도 누가 또 알아 보겠는가.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연구한 사람이 ‘바이칼Baikal’의 원래 이름은 ‘빛깔’이라고 했다. 해 질 무렵 석양으로 물드는 하늘과 호수가 포개져 황홀경을 연출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것이다. 사물에 처음 이름이 생길 때 참으로 단순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무리가 공감하는 바탕에서 자연스럽게 갖추어지는 것이다. 풍화되어 남은 이름 하나에도 길고 긴 역사가 담겨 있다. 모래 한 알에 담긴 이치를 꿰뚫어야 한다. 말하자면 바이칼은 우리말의 뿌리가 있는 동이東夷의 고향인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지난날 여류당如流堂이 몇 번이고 거듭하여 바이칼을 찾았던 것이다. 바이칼의 얼음 같은 물에 몸을 담그고 아득히 울리어오는 야성野性의 부름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눈으로 보려고 했다면 볼 수 없을 것이다. 귀를 기울인다고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 다. 오로지 심혼泗艮으로 열리어 짐승과 신령은 서로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그뿐이 아니다. 신령한 짐승은 기어코 히말라야와 천산天山을 넘어 몽고蒙古의 대초원 에서 바람과 더불어 어슬렁댄다. 지상의 별처럼 무리 지어 핀 들꽃 사이로 이름 없는 짐승이 되어 몸을 누인다. 수수만년 침묵 속에 빛나는 밤하늘의 별과 성운星雲. 그침묵 속에 아득히 울려오는 야성의 부름 소리. 멀고 가깝게 대지를 울리는 심장 뛰는 소리. 하늘과 대지와 사람이 경계를 허물고 아무 구별 없이 하나로 숨쉴 때, 그 이름은 무엇인가.
망망하게 열린 밤하늘, 조류潮流를 이루어 도는 별무리의 대해大海에서 처음으로 부동不動의 별 하나를 응시한 사람은 누구였 을까. 추위와 기러기 떼가 내려오는 쪽을 누가 북北이라 했으며, 무한한 허공을 가르며 방위를 정한 것은 누구일까. 마침내 하늘과 땅과 사람이 더불어 하나인 이치를 깨달은 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태어나고 죽어가는 무수한 생명의 순환 속에 끝내는 지고지순至高至 純의 마음이 열리어 혼백魂魄의 길을 파지把持한 그는 또 누구인가. 모르긴 해도 하늘이고, 대지이고, 사람이기도 한 신령한 짐승의 무리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신령한 짐승’은 생태적 인간과 관련한 내 오랜 화두이다. 본시 우리는 숲속에 둥지 튼한 마리 짐승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여느 짐승들과 달리 땅에 서서 두 손을 모으며 하늘의 신령함을 가슴에 품어왔던 짐승이라 할 수 있다.
두 발로 굳건히 땅을 딛고 어머니 대자연의 품속에 자리한 한 마리 짐승이면서 동시에 머리에 이고 있는 그 하늘의 신령함을 가슴에 품고 사는 존재, 그것이 생태계의 여러 종과는 구분되는 인간이라는 이름을 지닌 존재의 바른 정체성일 것이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짐승을 나는 ‘신령한 짐승’이라 부른다.”
처음으로 사람에 대해, 아니 자기 자신을 향해, 신령한 짐승이란 이름을 붙인 여류당의 독백獨白이다. 그것이 자신의 오랜 화두話頭라고 한다. 화두란 자신이 찾아 이루고자 하는 근원적인 주제이자 미완의 과제다. 그의 표현처럼,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서의 사람이 기도 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함께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세상의 끝에 서는 단 한 사람, 자기 자신밖에 없다.
무심히 처음 여류당의 손을 잡았을 때,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지금인들 그가 짐승 인지 아니면 신령한 그 무엇인지 모르고 지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때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나에게 쥐어진 것은 그의 손바닥에 응어리진 거칠고도 거친 굳은살이었다. 어둠 속에서 이런 손바닥을 만졌다면 차라리 짐승이라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노동으로 겹겹이 쌓인 세월이 있었다. 그 손을 두고 내가 어찌 미화하려 들겠는가. 여류당은 내가 그동안 더불어 지내온 이론이나 지식으로 살아가는 그런 유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목월木月의 술 익는 마을에서 육사陸史가 담은 포도주를 기울이자. 여기에 시詩를 더하니 부족함이 없다. 일하고, 배우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같이 조화로운 이 누리가 아닌가.
보라! 새날의 찬란한 빛 속에 어린 신령한 짐승들이 해일海溢처럼 밀쳐오느니!